'심산 김창숙'은 어떤 인물인가 ?

독립운동가,교육자,정치가 '심산 김창숙'을 분석한다.

뉴민주.com | 기사입력 2010/09/17 [02:50]

'심산 김창숙'은 어떤 인물인가 ?

독립운동가,교육자,정치가 '심산 김창숙'을 분석한다.

뉴민주.com | 입력 : 2010/09/17 [02:50]

 

▲  '심산 김창숙'               © 뉴민주.com

▲1879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사도실)에서 출생.

   (본관 의성,호 심산,별호 벽옹)

▲1905년: 이승희와 함께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

▲1908년:대한협회 성주지부조직 구습타파.계급철폐 계몽운동

▲1909년:성명하교창립,일진회를 성토하는 건의서건 체포됨.

▲1910년:전국단연맹 성주대표로 활약.

▲1919년: 3.1운동직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위해 곽종석,김복한등 영남,충청유림137인이 서명한 독립체제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망명(제1차유림단 사건)

▲1920년: 중국정부 요인과 접촉하여 '중한호조회'를결성,한,중 양민족의 연대와 공동투쟁도모,북경에서 박은식과 사민일보,신채호와'천고'를 발간.

▲1927년: 유림단 사건후 국민회의와 임정의별단에 참여하던중 상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압송,1년간 옥고를 치른 후 1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옴

▲1944년:비밀결사인 건국동맹 남한대표로 추대됐으나 다시 투옥돼 옥중에서 해방을 맞음.

▲1945년: 해방후 민중당 당수로 추대되었으나 거절하고 임시정부의 기치아래 좌우익분열,대립을 초월한 민족 대동단결을 촉구함,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반대,이승만과 반탁운동을 전개.이승만의 반민족적 행위에 일침을 가하고 김규식과의 견해차이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유림 재조직과 성균관대학 재설립에 주력함.

▲ 1946년: 성균관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후 분단이 가시화되자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7거두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헌신적 노력.

▲ 1951년: 이승만 하야 권고문을 발표.

▲ 1952년: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옥고를 두번이나 치름.

▲ 1953년: 성균관 대학교를 건립하고 초대총장에 취임 

▲ 1957년: 자유당 정권의 압력으로 성균관대 총장등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함. 이후 보안법 개악 반대투쟁과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지도함.

▲ 1962년: 5월10일 84세로 별세.(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음,사회장으로 장례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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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초기

경상북도 성주 대가면 사월리에서 영남의 유학자 집안 출신이며, 선조 때의 정승 김우옹(金宇顒)의 12대손 칠봉(七峰) 김호림(金頀林)과 인동장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당시 이름이 높던 유학자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학혁명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 김호림은 서당에서 친구들과 학습중이던 김창숙과 학생들을 불러내 농부들의 노고를 지적하며 농사일을 도울 것을 지시하였다. [1] 이날부터 아버지 김호림은 귀천을 따질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농업에 동참하게 하였다. 또한 여자아이를 시켜서 밥을 보냈는데, 늙은 종과 일꾼들에게 먼저 주고 그와 학생들에게는 나중에 주었다.[1]

[편집] 청년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군에 대한협회 성주군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주장 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발송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이후 술에 취해 방랑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부산을 떠나 대구로 압송된 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2] 그러나 김창숙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고문을 통해 나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기를 원하느냐. 내가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3]
김창숙은 입을 열기를 거절하며 시 한수를 지었다.
광복을 도모한지 십수년에 / 집도 목숨도 모두 잊었노라 / 돌무더기에서 스러진 삶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 새삼 야단스럽게 고문한들 무엇하리요[4]

 
한시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형사는 조선인에게 한시를 해석해줄 것을 부탁했고, 한시의 뜻을 해석한 일본인형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선생이라 부르며, 고문형을 완화시켜 주었다. 법정 예심이 끝나자 일본인판사는 그가 수감된 감옥에 직접 찾아와 개인적으로 만나 시국을 논할 것을 부탁했으나 거절하였다.[5] 가족들은 그에게 변호사 선임을 의논하였다.[5] 그러나 그는 변호사 선임을 거절하였고, 변호사 김완섭이 세번이나 면회를 왔으나 뜻을 바꾸지 않았다.[6] 징역 1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편집]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제출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를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 한다.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을 지냈다.

 
이후 임시정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을 조정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쑨원(孫文)을 비롯,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 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도 만나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 기여하였다. 망명한 한국인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후원하였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창간,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국제연합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자,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을 성토하는 활동을 했다.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1921년 4월 19일 이승만을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지은 성토문에는 김원봉, 이극로, 신채호, 오성륜, 장건상 등 54명이 서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1925년), 서로군정서의 군사선전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류하여 '한국독립후원회',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 등을 결성하고, 이들의 협조를 받아 만주몽골의 황무지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1925년 8월 독립운동 기지의 개간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의 모금운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들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이동녕, 김구 등과 협의해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열단나석주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이다.
1927년 5월 병으로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에 입원 중에 일본인 밀정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 뒤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 옥중 투쟁을 벌였고,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자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였으며, 이해 모친 인동장씨가 사망하여 21년 만에 다시 고향인 성주로 돌아왔다. 1943년 아들 김찬기대한민국임시정부에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찬기는 곧 병으로 사망한다.
1945년 여운형이 조직한 지하 비밀결사인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었다. 왜관 경찰서에 구속되어 수감 중, 일제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  창작 오페라 '심산 김창숙' 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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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광복 이후

[편집] 해방정국의 정치 활동

1945년 8월 광복 직후 여운형·박헌영에 의해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비판을 가하였다. 이후 중경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자신을 당수로 추대하려는 군소정당들의 손길을 모두 거절하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주위에서 이승만을 찾아갈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었다.[7]

 
10월 21일 미국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국외교정치위원회 회합에서 한국은 지금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신탁관리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신문에 보도되자, 김창숙은 이승만을 찾아 여러번 물었으나 이승만은 답변을 회피하고 건국사업에 급한 재정문제를 들고 나왔다. 김창숙은 민족의 단합이 시급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으나, 이승만은 금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여[8]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9]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0]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1] 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12]
1946년 1월 비상국민회의 특별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23일 김구가 정국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소집한 비상정치회의 주비회의에서 좌파계열 임정 국무위원인 성주식·장건상·김성숙 등이 탈퇴하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13] 중경 임정 측이 과도정부 역할을 하려고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을 주석으로, 김구를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재보선할때 김창숙도 오세창·박열·조만식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선출되었다.[13]
1945년 10월 28일 김성수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14]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민주의원 회의에서 이승만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다.[15] 이후 민주의원에서 활동하며 정당난립과 신탁통치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 문제 등으로 다른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교육과 유림계 재건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창숙은 이때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5]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했고 김창숙도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으로 선발되었다.[15]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주한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김창숙은 여운형, 함태영,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15]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15]
이미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던 김창숙은 유학자로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을 위해 기존의 성균관을 정비하고,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기치로 명륜전문학교를 병합, 1946년 9월에 성균관대학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 2월에는 전국의 향교를 규합해 성균관대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오세창, 조만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16] 9월 5일 임시정부가 다시 국무위원을 보궐선거하여 김성수, 김승학을 추가로 국무위원에 선출했을 때, 김창숙도 국무위원으로 재선 연임하였다.[16]

 

[편집] 정부수립 이후

1948년 3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했으며, 4월 김구·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이 남북협상을 추진하려 할 때 남한이승만의 협조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북한 김일성의 협조를 얻어내는가 하며 김구의 남북협상 주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뒤 이승만 정권 때는 야당활동을 하며 독재와 부패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17] 1951년 한국 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951년 5월 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18] 그러나 선거 결과는 낙선하였다. 1차 지명전에서 1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1표를 받았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이시영. 조병옥. 김성수 등과 반독재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이승만정권과 계속 투쟁하였다. 1953년 성균관대학이 4년제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6년 강압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강제 사임하게 되었다. 1957년 성균관 관장, 유도회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당하였다. 1959년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서한을 발송했다.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되었고,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이승만 퇴진 이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어 출마하였다.[19]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9표를 얻어 낙선, 208표를 얻은 윤보선에게 패하였다.[19]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병중에 박정희의 방문을 받았으나 외면하였다.
그 외에 의성김씨 중앙종친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20]

 

[편집] 사후

1962년 노환으로 죽은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고, 같은 해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에는 심산 김창숙의 생가, 청천서당, 청천서원 등 동강 김우옹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있다. 김창숙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는 청천서원 200m 아래쪽 사도실마을 어귀에 있다.[21]

 
현재의 건물은 옛 건물이 화재를 당하여 안채는 1901년, 사랑채는 1992년 중수한 것이다. 현재 김창숙 생가는 90세가 넘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 월성손씨가 집을 지키고 있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며느리의 생활은 고단했지만, 그녀는 수절을 택했다. 이런 며느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하여 담뱃불을 붙여달라면서 시아버지 김창숙은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다.[21]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학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22]
 
                                                                                                                            뉴 민 주 닷 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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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군 2010/10/12 [15:41] 수정 | 삭제
  • 독립군죽이던 매국노가 불법쿠테타로 엄청난 군인과 국민을 살해하고 불법집권후
    영구집권위해 헌법까지 강제로 고치며 국정원시켜
    수많은 민주국민과 학생을 암살과 감옥서 사형이나 감금시켰는데도

    또 엄청난 부정축재 저지른 매국노임에도
    아니라고 공갈치는 박빠들은 부정축재한 돈이많아 일당받는 차떼기당 여론조작 알바거나
    친일파후손들이라 매국노를 편드는것같다

    불법쿠테타후 곧 일본가서 일본에 충성서약후- 장면정부의 30억불 침략배상 요구를 3억불 싸구려로하여
    일본이 약탈해간 금은보화와 지하자원 문화재수만점과 쌀 또 강제동원피해자와 학살자 피해배상못받게하였고

    우리땅 독도근해를 일본요구로 공해로만들어 현재 독도분쟁만든 매국노로
    만주일본장교 상관인 일본정부의 협상책인 세지마류조에게 6600만불 뇌물받았고
    세지마 지시에따라 일본기업에 한국서 이익줘 3억불 수십배를 일본이 한국서벌어갔다

    또 스위스로 50억불 부정축재 빼돌리고 어린여자들 매일밤 강제로 성폭행하곤 돈으로 입막고
    추종세력에 충성하라고 돈뿌려 정경유착 최저임금에 세계최고노동시간으로
    국민과 근로자 착취한돈을 경제발전에 안쓰고 멋대로써

    우리와 비슷한처지의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북한 싱가폴 대만등 아시아국가중 꼴찌로 경제살리곤
    경제많이살렸다고 관제교육과 관제방송으로 국민속인것이며

    정경유착 기업과짜고 월급올려달라거나 노동시간줄여달래도
    또 독재반대해도 간첩이나 빨갱이로몰아 구속시켰고 기업서 이익나눠가졌고

    얼마전 한나라당 대표보던 박근혜도 일본함정이 독도를 침범 전국민이 성토하자
    울릉군만나서지 전국이 시끄럽게 떠든다고 일본에 충성위해 한국인에 매국망언한 매국노딸로

    당시 강도짓한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영남대학을 국가에 반납않하고 사학재단을 돈벌이하려고
    사학비리법 못고치게 앞장서 현재 교육비엄청올리게만든 나쁜여자로 전국서 영남대학수업료가 제일비싸고
    값비싼 의상 수백벌등 박근혜의 사치와 낭비가 국민세금이며

    박정희 육영수일가들 부정축재가 수십조가 넘듯이 국민갈취한 매국노를 추종하는것들중엔
    일부 멍청한 경상도인 지역감정과 역사왜곡에 속은 늙은이들도 있지만
    박정희가 충성하라고 뿌린돈받거나 일본에 충성하던 매국노와 후손들이 매국댓가 돈이많아

    일부사립학교와 일부교수들과 일부재벌과 조중동과 다른나라위하는 딴나라당의원들로
    사회 기득권차지 자기들 자리지킨다고 보수라하며 유유상종 매국노 박정희를 미화하는것이며

    이렇게 한국의 자칭보수들은 외국과 달리 친일매국노와 후예들이 많아 애국심이 없어
    군대않가려고 사회기득권과 돈을이용 기피자들과 면제자들이 많고
    우파란 다른나라 간섭이나 지배를 물리치고 자기국가와 국토를 제일아끼는 국수주의와
    자기민족을 제일 아끼는 민족주의를 우파정신이라하는데

    이것들은 친일매국노가 일본에 나라팔아먹듯이 외국에 충성위해 민족간 평화통일방해하며
    독립군 나쁘게몰고 일본침략미화하고 독도를 일본에 바치려하듯이 가짜우파로 사대매국파인것이다

    정경유착 부패고리를보면 대우그룹 김우중이 정치권에 뇌물뿌리고 은행에 부정대출압력넣어
    수십조 부정대출후 고의 부도내고 외국으로 돈빼돌리고 않갚아도 감옥서 금방나오는것이
    회사공금으로 뽕쟁이 박지만에게 현재가치 100억원짜리 회사차려주는둥
    은행부도를 국민세금으로 막아 결국은 국민세금으로 뇌물뿌린댓가며

    지구상 매국노가 비록 불법쿠테타지만 18년 대통령해먹은나라는 창피하게도 한국뿐이며
    해방후 일본에게 조선서 약탈해간 금괴와 731부대무기정보받은 미국이
    독일처럼 갈라야할 전범일본대신 조선을 강제로 분단시킬때도 친일매국노들이 강제분단 도왔고
    6.25비극과 현재까지 분단고통만든게 음흉한 미국일본이며 그래서 친일파들이 평화통일방해하며 냉전조장하는것으로

    중국과 러시아견제 미국이익 주둔인데도 다른나라선 기지임대료 그나라에 바치는데
    한국선 남북분단과 매국정치권이용 꺼꾸로 한국돈 펑펑쓰며 상관처럼 영구주둔하려는 미국이며
    한국을 만만한 먹이감으로 생각해 미국인 않먹는 광우위험소도 매국정치권이용 한국에 팔아먹고

    친일파 매국단체 뉴라이트회원인 박근혜와 오사카인 이명박등이
    현재 외국이익위해 평화통일방해와 남북냉전조장하며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으려하고
    고의로 환율인상후 엄청난 미국무기수입과 일본위한 무역적자만들어 외국빚엄청늘려
    과거 딴나라당이만든 IMF국가부도를 도로 만들고있으며

    부자재벌감세로 복지예산삭감과 재벌기업위한 정책과 재벌백화점 마트 규제풀어
    슈퍼나 재래시장상인들 죽이고 세금올리며 물가폭등 서민과 중소기업 자살자 세계최고만들고

    일본이 백두대간에 쇠못박아 한민족 맥끊듯이 나라지킨다는 뜻이있는 남대문 불태우고
    4대강에 댐과보로 맥끊고 환경식수파괴와 국고낭비를 매국노딸 박근혜도 편드는것으로

    일본 정치권이 평화통일되면 남한의 기술력과 북한의 지하자원과 유럽직항철도로 통일한국이 급성장 강대국되어
    친일파 일본장교이용 싸구려배상도 독일처럼 철저히배상해야하고 독도침략도 힘들어지고
    독일처럼 철저히 배상하라는 북한강제동원피해자들과 약탈물품을 철저히 배상해야할테니
    죽어라고 평화통일 강대국이 탄생하는걸 싫어하며 북한을 중국이 흡수하길바라듯이

    평화통일로 향하던 남북교류 고의로 깨트린 친일매국정치권의 남북냉전조장으로
    북한이 남한과의 평화교류에서 중국과 교류를 확대하였고

    한반도에 영구주둔하려는 미국이 식민지처럼 한국군 전시작전지휘권이용 미국세력확장용 전쟁발발시
    북한이 전쟁에 패할때 코앞에 미국미사일기지가 서는걸 반대하는 중국,러시아가
    6.25처럼 분명 전쟁에 참여 한반도가 생명체 못사는 폐허가될테고

    악랄한 경제봉쇄로 붕괴시에도 중국으로 흡수하려고 중국이 동북공정 역사조작하듯이
    친일매국정치권이 일본위해 한반도를 영구히 가르려하고있다

    6.25전쟁때도 전쟁나면 점심은 평양서 저녁은 신의주서 먹는다고 전쟁부추긴 이승만과 부패내각들 모두 외국으로 도망치고
    죄없는 남북국민과 군인들 300만명이 숨졌는데 현대전쟁은 피해가 엄청더크며

    독일처럼 평화적 남북교류로 북한을 시장경제 자유민주국가로 이끌어 유럽처럼 좌우파 모든정당이 존재하는
    국민직접투표로 자유롭게 선진복지국가로 나가야하며 그것이 진정한 자유민주국가로

    북한이 인구가적고 북한내에도 공산당말고 다른당 선호자가 많으며 공산당도 쇄퇴해가는 추세라
    공산당이 집권하긴 힘들며 그래야 북한도 세습정치도 힘들고 시장경제 자유민주국가로 바꿀수있고

    지금처럼 미국일본과 짜고 북한을 악랄한 경제봉쇄나 선제공격위협하면 국방비지출로 북한경제가 더나빠져
    통일비용도 더들고 북한은 더욱더 권력세습처럼 내부결속을 할것이고 권력유지위해 중국과 더 가까워질것이다

    북한이 핵만든 원인도 미국이 한반도에서 영구주둔키위해 북한을 붕괴시키려고
    과거 우리도있는 핵발전소 핵무기만든다고 미국,일본이 트집잡아
    핵발전소 가동대신 중유발전소와 중유제공키로 제네바협정맺었는데 미국일본이 깨트리고
    악랄한 경제봉쇄로 농지가 적고 지하자원과 중공업수출이 주업인 동포들 굶주리게하고 선제공격위협에

    참다못한 북한이 2006년 처음 핵실험하게만든뒤 3년전엔 핵실험공장 파괴하면 경제봉쇄 풀어준다 꼬드긴후
    북한이 핵실험공장 파괴하자 언제 그랬냐식으로 공갈치며 악랄한 경제봉쇄로 동포들 굶주리게만든 더럽고 음흉한 미국일본이며

    우리헌법에도 평화통일 지향해야하며 천안함 북풍조작처럼 전쟁위기만들거나 침략전쟁은 분명 불법이라 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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