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에 얼어 죽은 시민정신 보는 듯하다

<뉴욕칼럼> 민주주의의 하인들

채수경 | 기사입력 2010/01/08 [12:03]

폭설에 얼어 죽은 시민정신 보는 듯하다

<뉴욕칼럼> 민주주의의 하인들

채수경 | 입력 : 2010/01/08 [12:03]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주(主)는 ‘王’ 모양의 촛대 위의 촛불을 그린 것으로서, 어두운 방안에서는 촛불을 중심으로 둘러앉기에 ‘중심이 되는 것’ ‘임금’ ‘당사자’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됐던 바,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民)을 중심으로 삼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다. 절대왕정과 독재가 무너진 이후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천명하고 있지만 품질은 가지가지다. 맨해튼 5번가 명품 백화점 삭스 피프스에서 팔리는 것도 있고, 모스크바 뒷골목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것도 있고, 청계천 붕어빵 장수들이 떨이로 파는 것도 있다. 민주주의의 질은 중심이 되는 인민의 질에 따라 정비례한다는 말이다. 
 
인민의 질은 거저 향상되지 않는다.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누구나 시민임을 주장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침 튀기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시민임을 주장하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시민을 뜻하는 ‘citizen’의 뿌리는 고대 프랑스어 ‘citeien’으로서 말 그대로 ‘city 사람’을 뜻하지만 그 ‘city’라는 게 고대 도시국가나 중세의 ‘성(bourg)’을 의미했었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특히 중세기에는 성 밖 대부분의 농촌은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던 반면 성 안의 상공업자들은 국왕과 교회 등의 대립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치권을 획득했었고 심지어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꾸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었다. 그런 능력과 교양을 가진 사람들만 ‘citizen’으로 불렸던 바, 이른 바 ‘부르주아지(bourgeoisie)’다. 지금도 ‘성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burgher’와 ‘citizen’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인들의 시민정신은 어느 수준? 사상 최대의 ‘눈 폭탄’을 맞아 서울 시내가 마비되는 사태를 겪은 후 어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제설대책 개선을 위한 관계기관회의에서 소방방재청이 “내집·건물 앞 눈을 치우지 않을 경우,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여기저기서 “국가가 해결해야할 것을 왜 국민에게 강요하느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음에 아직도 한국 민주주의 수준이 바닥을 기고 있는 데서 보듯 시민정신 또한 그 나물에 그 밥 수준임을 실감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기상예보가 틀렸을 경우에도 벌금을 물릴 거냐?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의 경우 입주자 모두 연대책임을 져야 하느냐? 등등 초등학생들도 눈살 찌푸릴 별별 유치찬란한 질문과 지적도 함께 쏟아져 나온다.
길을 걸어가다 넘어져 코가 깨져도 대통령 책임, 물놀이 하다가 빠져 죽어도 국가 책임, 정치인들 뒤꽁무니나 졸래졸래 따라다니면서 뭐든지 국가를 물고 늘어지는 습관이 굳어진 탓인지 처벌규정 도입 찬반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도 반대 의견이 67.4%로 찬성 의견(25.1%)을 크게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설 속에서 얼어 죽은 시민정신을 보는 듯하다. 자기 집이나 점포 앞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넘어져 다치거나 불편을 겪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가 아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시민이 곧 정부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의 수준이 높아지려면 국민의 수준부터 높아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자기 집 앞 눈조차 과태료 부과해야 치운다면 민주주의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임을 자인하는 꼴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채수경 / 뉴욕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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