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항일 음악가 정율성정체성!

정율성음악으로 13억 지나 대륙울려,문화교류 경제협력 강화할수 있아야

윤복현 객원논설의원 | 기사입력 2012/01/22 [18:50]

조선의 항일 음악가 정율성정체성!

정율성음악으로 13억 지나 대륙울려,문화교류 경제협력 강화할수 있아야

윤복현 객원논설의원 | 입력 : 2012/01/22 [18:50]
▲     © 뉴민주.com
중국인구 6억명 이상은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로 정율성을 기억하고 있고, 중국인구 10억명 이상은 정율성이 작곡한 노래를 적어도 한 곡 이상 부를 줄 안다.
 
우리나라의 아리랑과 같은 '연안송'의 작곡가가 정율성이며, 홍군의 대장정을 직접 답사하고 그 감흥을 바탕으로 작곡한 '팔로군대합창'은 1988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중국인민 해방군 군가'로 공식비준되었으며,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개막식 첫프로그램으로 연주되었다.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13억 중국인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는 작곡가가 전남 광주출신의 정율성은 항일무장투쟁노선의 <의열단>출신의 항일조선인이면서도 1937년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중국 3대 음악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념을 떠나 고난과 시련을 마다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되찾기 위해 항일광복운동을 했던 모든 분들을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조명하고 추모해야 한다.
 
그 분들의 시련과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규명하고 비추는 일이 언론방송의 사명이다. 한중수교를 맞아 정율성이란 조선이
낳은 중국 최고의 음악인을 매개로 대한민국과 중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실현되기를 바라고,100년전 대한민국의 영토인 우리 민족의 땅 만주도 속히 반환받기를 바란다.미국과 더불어 한반도 분단의 공범인 러시아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적극 협력하고 100년전 대한민국의 영토인 연해주를 돌려주기를 촉구한다.

남북한의 모든 동포들도 미국과 소련이 심어 놓은 좌우 이념의 족쇄에서 벗어나 좌우를 뛰어 넘는 홍익주의로 민족공동체 의식으로 단결하여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야 하겠다.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은 그러한 과정에 서있다.


15일 KBS스페셜에서는 <13억 대륙을 흔들다-음악가 정율성> 편을 방영했다. 제작 PD에 따르면 원래 지난해 8.15 광복절 특집으로 나갔어야할 프로그램이 이념논란 문제로 두 번의 방송 불발을 거치면서 다섯 달 만에 방송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지나땅에서는 13억 중국인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고 있는 작곡가로 광주 출신의 정율성은 의열단 출신의 조선인이면서도 1937년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지나국 3대 음악인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현재 행사 때마다 연주되는 중국의 공식 군가가 정율성이 작곡한 음악이다.한중 수교 20돐 방송인지는 몰라도 KBS에서는 정율성에 대한 방송을 방영했다. KBS노조을 비롯한 사이비 보수세력은 냉전논리를 내세워 방송을 내보낸 책임자를 해임하라는 요구를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분단주의적 사고방식이다.

항일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방송이 방영되기까지 우여곡절을 담당 PD로부타 들어 보자.

"프로그램은 6월초에 기획됐다. 방송시점을 두 달 앞두고 있어서 제작자 입장에선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길지 않은 그 기간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6월 하순에 중국출장을 이틀 앞두고 있을 때 이례적으로 당시 콘텐츠 본부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중간간부로부터 직접 보고받았고, 8월 초순에 한창 마무리 촬영과 편집중 일땐 또 이례적으로 사장님이 요구해서 기획방향과 취재내용을 본부장님으로부터 직접 보고받았다. 하지만 제작을 멈추라는 지시는 없었다.

다만 잘 마무리하라는 말씀만 있었다. 그리고 방송 나흘 전이면서 프로그램 시사를 하루 앞둔 날, 갑자기 방송 취소가 결정됐다.

이례적으로 사장과 본부장까지 검토하고 승인한 개별 프로그램을, 이례적으로 이사회가 막아서서 방송이 되지 않았다. 나중엔 감사까지 나서서 막았다고 한다. 더더욱 공영방송인가하는 노조까지
앵무새처럼 떠벌이며 방송을 반대했다. 노조까지 막아선 이례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개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그 위기에서 구해준건 동료 피디들이었다. 넘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은 심정이었을 때, 다가와 팔을 내밀진 않았지만, 동료들은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것이다.

한마디만 더 하고 싶다. 한 두 마디 문장을 앵무새처럼 외워서 떠들며 이념공세를 펼치는 분들에게. 지금의 북한 사회를 보면 참 재미있다. 3대 세습을 해도 북한은 꿈쩍하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어서이겠는가? 절대 아니다. 대다수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있겠지만, 북한 체제를 옹호하며 남한을 절대악처럼 여기며 3대 세습을 떠받치는 앵무새 떠벌이들의 과잉충성과 그 충성으로 얻는 떡고물이 어떻게든 이 괴상한 북한체제를 이어가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친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세상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의 앵무새를 떠올리곤 한다. 묘하게 이들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겹친다.

어떻게든 체제수호란 명분으로 떠들어 대며,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고,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목내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나도 체제수호에 앞장서고 싶다. 하지만 내가 수호하고 싶은 체제는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때마다 냉전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해 여전히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

‘과거 일제부역을 청산하고, 박정희 독재 아래서 비명조차 못 지른 민주화, 노동 운동가들의 희생을 제대로 역사적 사실로 알리고, 광주학살을 제대로 밝히고, 최근 이명박정권의 부도덕한 집권행위까지 제대로 까밝히는, 그래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는’ 그런 체제다. 케케묵은 냉전이데올로기를 지금까지 끌어와 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며, 부도덕한 정권으로부터 떡고물을 목 늘어뜨리며 기다리는 분들은 이상하게 내가 방금 말한 사실들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모르는 걸까? 부끄럽지 않은 걸까? 진정으로 치욕적인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걸 보면 새가 맞는 모양이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774

이념을 떠나서 조국과 민족을 찾겠다고 싸운 항일광복운동가들은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추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없다면 오늘날 대한민국과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은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사고이고 체제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의 선택 또한 국민대중이 할 수 밖에 없다.

소수가 독식하지 않는,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경제와 복지가 실현되는 자유민주주의를 대중이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그렇게 없다는 말인가? 중국을 개방개혁으로 이끈 등소평이 말했다. "인민이 배부를 수만 있다만 시장경제도 수용할 수 있다."고..그리고 현재 북한도 별 수 없이 경제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중국식 개방개혁노선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과 남한의 경제적 차이가 30배라고 한다. 북한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필요할 때이다.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경제적으로 협력할 때이다. 물론 자주국방을 전제로 말이다. 냉정의식을 강조하는 정치집단이야말로 권력유지와 기득권 유지에 눈이 뒤집힌 나머지 북한을 악용하려는 숭미사대주의 반민족 세력임을 드러내는 꼴이다.

북한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길이 북한의 민심을 바꾸는 지름길이다. 또한 지나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길이 지나대륙으로 진출하고 지나시장을 차지하는 지름길이며, 공존 공생하는 길이다.



고대 백제가 서해를 건너 단군족이 거주했던 지나 동해안지역으로 진출하여 무역시장을 확대하고 영토를 점유해 나간 노선이 바로 담로였던 것 처럼 말이다. 13억 지나인들이 존경하고 추모하는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매개로 지나국과 문화적 교류를 확대할 수 있고 경제협력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13억 지나인들이 추앙하는 조선 음악인 정율성은 누구인가?

1918년 8월 13일 전라도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난 정부은(정율성의 본명)은 민족의식이 강했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정해업은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자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 지조있는 선비였고, 3·1운동에 가담했던 큰형 효룡은 중국으로 망명, 조선으로 돌아와 비밀공작을 수행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934년 옥사한다. 국민혁명군 제 24군의 참모 직책을 맡고 있던 둘째형 인제도 무한전투에서 전사했다. 바로 위의 셋째형 의인 또한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에서 학생 모집책임자로 활동했다.

청년 정율성이 중국행을 결심했던 것도 이런 집안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5살 때인 1933년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항일투쟁조직 의열단이 조직한 ‘조선혁명 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 삼민주의, 조선역사, 맑스-레닌주의를 배웠다.

이곳을 졸업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정율성은 친구의 소개로 중국 상해에 체류하던 러시아 음악가 ‘크리노와’(Krenowa)를 소개받는다. 크리노와는 레닌그라드 음악대학 교수 출신으로 단박에 정율성의 재능을 알아 보았다. 1주일에 한 번씩 남경에서 상해까지의 수백Km를 오가며 음악적 재능을 불태웠던 정율성에게 크리노와는 상해에서 열린 “세계명곡 음악회”의 테너 선창을 맡기기도 했다. 2년 남짓 정율성에게 성악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던 크리노와는 그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제안했지만, 그는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족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36년 정율성은 김산(바로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들이 결성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한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중 연합전선을 통한 일제 타도’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당시 남경에서 결성된 진보적 항일문예단체인 ‘5월문예사’ 창립대회에서 정율성은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불러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이듬해인 1937년 7월, 로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에 맞서 정율성은 ‘대공전복무단’(大公戰服務团) 선전대대 음악대장을 맡아 항일 가요들을 작곡하기 시작한다.“일제의 포화 두렵지 않거니”로 시작되는 ‘유격전가’와 ‘전투부녀가’ 등이 이 시기 작곡된 곡들이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채 스물이 안 된 19살였다.

당시 장개석군의 대규모 소탕작전을 피해 고난의 ‘대장정’을 단행했던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연안에 있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데다가 일제와의 전투에도 소극적이었던 국민당 정부에 실망한 많은 중국 젊은이들처럼 청년 정율성도 연안행을 결심하죠. 정율성의 아내 정설송 여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어깨에 메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힘 있는 발걸음으로 호호탕탕한 연안행 대열에 따라섰다.”고.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의 생활은 몹시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음악가 정율성에게는 불타오르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이 당시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그가 작곡한 ‘연안송’은 연안뿐 아니라 전 중국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중국인들을 항일투쟁 전선으로 불러 모은 불멸의 송가였다.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정율성은 시인 공목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팔로군대합창’의 노랫말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전선에서 돌아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던 공목은 그의 경험을 살려 불과 며칠 사이에 노랫말을 써서 정율성에게 건네 준다. 팔로군에 걸맞게 공목이 쓴 노랫말은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 등 모두 8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1939년 겨울,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대합창’은 로신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책으로 엮어져 전국에 보급되었고, 1940년 초 정율성의 지휘아래 ‘팔로군 대합창’의 첫 공연이 연안에서 열렸다. 그 후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정식 군가로 채택된다. 1942년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조선인 무정장군을 따라 태항산으로 들어가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군정학교 등을 조직하는데 참여한다. 이때 그가 작곡한 곡으로는 ‘조선의용군 행진곡’ ‘혁명가’ 등이 있다.

특히, 조선의용군 행진곡은 지난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의 순안공항에 내릴 때 연주되었던 곡이기도 하다. 일본이 패망하고 팔로군이 인민해방군으로 개명되자 ‘팔로군행진곡’도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곡명이 바뀌게 된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북경 천안문 광장에 울려 퍼진 곡도 바로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이었다.

해방이 되자 정율성은 조국에 돌아와 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겸했으며,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장을 맡았다. 이 당시 그는 ‘해방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훗날  ‘조선인민군가’가 되었다.(이곡 역시 지난 2007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한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했다)

음악가 정율성의 생애는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1959년 그는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고, 1960년대를 휩쓴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정율성은 간첩 혐의로 수감되어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10여 년 간 그는 고된 노동과 엄중한 감시 속에서 고통 받아야 했고,그의 작품들은 연주되거나 방송되지 못했다. 모택동이 죽은 후인 1976년 그는 사면·복권되어 새로운 창작에 몰두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해 12월 7일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중국의 3대 음악가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그는 생전에 가곡과 합창곡, 가극, 동요, 영화주제곡 등 360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중국의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그의 비석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정율성의 음악은 문화혁명이란 미명아래 수 많은 문화인들을 숙청한 모택동집단과 동족상잔을 부추긴 김일성집단에게 악용된 점도 있지만, 정율성의 음악성은 서양음악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정율성이 음성을 통하여 딸에게 남긴 애창곡은 정율성의 마음 속의 고향과 조국을 그리는 '매기의 추억'이였다. 정율성은 생전에 자주 애창곡이였다고 한다. 좌우이념을 떠나서 정율성 또한 한국인이였던 것이다./ 매기의 추억(연주곡 ) / 한중수교기념 동영상-십자령에 뿌린 조선의용대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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